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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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0년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14번째 FIFA 월드컵. 이탈리아로서는 1934년 이후 56년 만에 개최하는 2번째 월드컵이다. 냉전의 종식과 동구권의 해체 기운 속에 치뤄진 월드컵에서, 서독이 매우 의미있는 우승을 차지한 대회이다. 이 대회를 끝으로 서독과 동독은 그 해 10월 3일 통일독일로 재탄생했고, 서독의 우승은 조국 통일을 몇 달 앞에 둔 하나의 축포였다.
소련, 체코슬로바키아가 출전한 마지막 경기였고, 유고슬라비아는 유고 내전으로 다음 대회의 출전 기회 조차 박탈당했다. 루마니아는 전년도 크리스마스날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총살당한 다음 해였고..
축구경기적인 차원에서라면 당시 소위 '''압박축구'''라 불린 수비위주의 축구가 극에 달한 대회였다. 당시에만 해도 수비수들은 '도살자', '살인마' 같은 별명을 갖게 되는 것을 명예롭다고 생각하던 시기였으며, 어지간한 백태클 푹한번 담궈줘도 옐로카드는 커녕 구두 주의만 받고 끝나던 시절이었다. 주요리그에서도 열몇골 넣으면 득점왕 한번 넘볼수 있기도 했다. 그래서 최악의 득점난을 가져온 대회가 되었다.
당시 세계축구계는 압박축구로 인한 저조한 득점 현상을 축구계의 위기로 보았고, 이에 FIFA는 이 대회 이후 파울 규정 강화, 골키퍼에 백패스 등 시간지연행위 규제[1] , 오프사이드 규제 완화, 승점제 변화 등 다양한 제도를 강구하게 되었다. 또 공격축구를 유도하기 위해 공인구 제작사인 아디다스사에 높은 반발력을 지닌 공인구를 개발하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축구의 변방으로 여겨지던 아프리카 대륙의 카메룬이 돌풍을 일으키며 큰 주목을 받았다. 이 대회에서 카메룬의 활약으로 아프리카 출전국 수가 증가하고 아프리카 선수들의 유럽 리그 진출이 본격화되는 등 큰 변화를 이끌었다.
1990년 월드컵의 특징 중 하나는 빅매치가 너무 빨리 성사되어 강팀들이 조기에 나가떨어졌다는 것이다. 16강에서 아르헨티나 VS 브라질, 서독 VS 네덜란드 빅매치가 성사된 것.[2] 아르헨티나와 서독은 전대회 우승, 준우승국이며, 네덜란드는 UEFA 유로 1988 우승국이었다. 브라질 또한 1989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국이자 상당히 강력한 스쿼드를 가진 팀으로 3개 대회 연속 조별리그 3전 전승을 기록했고, 결국 다음 대회인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우승을 이룬 우승 후보였다. 결국 16강에서 패한 브라질과 네덜란드는 조기에 짐을 싸야 했다.
2. 유치과정
유치 의사를 나타낸 것은 총 5개국이었다. 이 중 이란은 1978년 대회에서 자국의 첫 월드컵 본선 진출에 들떠 유치전에 나섰으나 해당 대회에서 탈락하고 다음 대회 본선 진출에도 실패한데다, 이슬람 혁명 크리까지 겹쳐 자진 포기했다.
나머지 국가들은 잉글랜드, 그리스, 소련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24년만에 도로 월드컵을 개최하려 한다는 부정적인 여론에 밀렸고, 그리스는 당시 월드컵 본선진출 경력이 없었던 것이 지적되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이탈리아와 소련이 결선투표를 진행했다.
그런데 개최지 투표가 진행되던 1984년은 미국과 소련이 서로 잡아먹을듯이 노려보며 전 인류가 '''핵전쟁과 인류멸망'''의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런데 서방세계 국가가 중심이 되는 기구인 FIFA에서 소련 편을 들어줄 리 없었다. 결국 총 16표 중 이탈리아가 11표를 가져가며 월드컵 개최를 확정. 이탈리아는 그래도 공산당도 있고 공산권 국가랑도 제법 친해서...
만약 이때 소련에서 개최되었다면, '''다 망해가던 나라'''에서 참으로 암울한 대회를 했어야 했으니 결과적으론 다행이었다. 대신,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가 2018년 대회를 유치했으니까 러시아 입장에서도 1990년 월드컵 개최권을 가져가지 못했던 게 그야말로 새옹지마가 아닐까….
3. 개최 장소
- 로마 - 스타디오 올림피코[3] (73,603명 수용) : 결승전
- 밀라노 - 산 시로[4] (74,559명 수용) : 개막전
- 나폴리 - 스타디오 산 파올로[5] (59,978명 수용)
- 토리노 - 스타디오 델리 알피[6] (62,628명 수용)
- 바리 - 스타디오 산 니콜라[7] (51,426명 수용)
- 베로나 - 스타디오 마르칸토니오 벤테고디[8] (35,950명 수용)
- 피렌체 - 스타디오 아르테미오 프란키[9] (38,971명 수용)
- 칼리아리 - 스타디오 산텔리아[10] (35,238명 수용)
- 볼로냐 - 스타디오 레나토 달라라[11] (34,520명 수용)
- 우디네 - 스타디오 프리울리[12] (35,713명 수용)
- 팔레르모 - 스타디오 라 파보리타[13] (33,288명 수용)
- 제노아 - 스타디오 루이지 페라리스[14] (31,823명 수용)
4. 진출국
● 표시는 개최국 자동진출, ★은 전 대회 우승국 자동진출이다. () 표시는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거친 팀이다.
- 남미(3.5장) :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콜롬비아)
- 북중미(2장) : 미국, 코스타리카
- 아시아(2장) : 대한민국, 아랍 에미리트
- 아프리카(2장) : 이집트, 카메룬
- 유럽(14장) : 이탈리아●, 루마니아, 스웨덴, 잉글랜드, 소련,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서독, 스코틀랜드, 유고슬라비아, 스페인, 아일랜드, 벨기에, 체코슬로바키아
- 오세아니아(0.5장) : 진출 실패
24개국 중 코스타리카, 아랍 에미리트, 아일랜드 3개국이 처녀 출전국이다. 이중 코스타리카는 멕시코가 출전정지 중징계를 받은 덕에 어부지리로 올라왔다.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멕시코 선수 중에 실제보다 나이가 많은 부정선수가 있는 것이 발각되어 FIFA가 멕시코의 1990년 월드컵 출전을 막은 것.
한편, 남미 예선에서 칠레가 실격당해 다음 대회까지 참여가 금지당했다. 칠레는 브라질과의 원정 경기에서 골키퍼가 브라질 홈관중이 던진 폭죽이 근처에서 터지자, '''얼굴을 크게 다친 척''' 하고 미리 준비한 피를 얼굴에 묻혀 나뒹굴었고 칠레는 즉시 경기를 중단하여 선수단 철수. 그러나 이 사실이 뒤늦게 발각되어 칠레는 1994년 미국 월드컵까지 월드컵 참가 불가라는 중징계를 받은 것이다. 물론 폭죽을 던진 관중도 칠레에 매수되었다고 한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루었다.영상웹툰 이건 칠레의 자폭이었다. 제3국에서 재경기를 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다는 명분으로 벌인 계획이었지만 오히려 이 계획 때문에 브라질이 손쉽게 월드컵 본선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고(이 계획이 들통나면서 브라질은 공짜로 1점을 더 얻었다.) 칠레 측에게 매수당해 골키퍼에게 조명탄을 던진 그 브라질 관중은 오히려 이 덕에 모국에서 '행운의 소녀'라는 찬사를 받았고 잡지 화보랑 광고까지 찍었으며 브라질 여행사의 홍보 사절로 뽑혀 이듬해 열린 이탈리아 월드컵을 직접 관전하기도 했다. 게다가 제3국에서 재경기를 한다고 해서 칠레가 이길 거라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5. 마스코트·공인구·주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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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코트의 이름은 이탈리아어로 '안녕'을 뜻하는 챠오(Ciao). 로고처럼 이탈리아 삼색기의 색깔을 사용한 사각형 블럭들을 사람 모양으로 연결시켜 형상화하여 만든 인간형 마스코트. 머리는 그냥 '''축구공'''이다. 이탈리아 국기색이 첨가된 것 외에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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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구는 에투르스코 유니코(Etrusco Unico). 내부에 풀리우레탄 품이라는 층을 두어 완전방수가 가능해졌고, 공의 속도가 많이 상승했다. 디자인적으로는 지난 대회에 큰 차이는 없고, 그냥 사자문양을 집어넣은 정도.
주제곡은 우리에게는 1988 서울 올림픽 주제곡인 '손에 손잡고'의 작곡자로 유명한 조르조 모로더가 작곡한 Un'estate italiana(영어제목 'To be Number One'). 이전에 작곡한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1988 서울 올림픽의 주제곡과는 달리 자신의 조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이기 때문인지 가사에서부터 이탈리아를 크게 부각시켰다.
6. 대회 진행
6.1. 조별 라운드
최좌측이 조 1위, 최우측이 조 4위이다. 굵은 글씨로 표시된 나라가 16강 진출국.
-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A조
-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B조
-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C조
-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D조
-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E조
-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F조
B조는 이번 대회 공인 죽음의 조였다. 대회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디펜딩 챔피언에다 여전히 건재한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 그리고 1988 서울 올림픽 금메달 및 UEFA 유로 1988 준우승에 빛나는 소련이 유력한 16강 후보로 점쳐졌고, 20년 만에 본선에 올라온 루마니아가 조 3위 자리에서 그나마 16강을 노려볼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특히 아르헨티나는 당시 이탈리아, 서독과 함께 우승 후보 1순위, 소련은 4강까지 무난하게 올라갈 수 있는 국가로 꼽혔다.
그러나 첫 경기부터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가 카메룬에 0:1로 패하며 검은 돌풍이 시작되었다. 카메룬은 동유럽의 다크호스 루마니아까지 격파하여, 결사적이었던 소련에 4:0으로 대패하고도 2승 1패로 '''조 1위를 차지했다.''' 아르헨티나는 이후 소련에 이기고 루마니아에 비기며 간신히 1승 1무 1패, 루마니아도 소련을 잡으며 같은 1승 1무 1패가 되었으나 다득점에서 루마니아가 2위, 아르헨티나가 3위가 되었다. 무승부만 아니었으면 골득실로 승부를 겨루려던 소련은 마지막 경기에서 카메룬에게 한 골도 내주지 않으며 4골을 뽑아냈으나 1승 2패, 조 4위로 탈락하며 소련으로서의 마지막 대회를 초라하게 마무리했다. 카메룬 > 루마니아 = 아르헨티나 > 소련 > 카메룬이라는 뫼비우스의 띠가 탄생했다.
C조에선 브라질이 양민학살을 하며 3전승으로 손쉽게 16강에 합류했다. 대회 첫 출전인 코스타리카는 스웨덴, 스코틀랜드를 연파하고 브라질과도 접전 끝에 0:1로 패하는 강팀의 면모를 보이며 2승 1패 조 2위로 16강에 진출, 멕시코에 가려졌을 뿐 만만치 않은 북중미의 강호임을 인증했다. 매 경기마다 2:1로 패한 3패의 스웨덴은 탈락. 1승 2패의 스코틀랜드도 다르지 않았다.
D조도 서독이 유고와 UAE를 각각 4:1, 5:1로 완파하는 독주를 보였고, 유고슬라비아는 아랍 에미리트를 4:1로 이기고 16강 진출의 명운이 걸린 콜롬비아전에서 1:0 신승, 2승 1패로 2위가 되었다. 콜롬비아는 서독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비기며 조 3위 자리를 따 냈다. 이 때 승점자판기 UAE는 첫 출전이었는데 조가 너무 안 좋았고, 이후로 다시는 월드컵에 출장하지 못하고 있다. 서독은 이 대회의 스타 플레이어 로타어 마테우스와 루디 푈러가 3골, 위르겐 클린스만이 2골을 넣었다.
E조도 D조와 매우 흡사했다. 스페인이 2승 1무, 벨기에가 2승 1패를 거두며 1, 2위를 차지했고, 펠레가 우승후보로 지목한 우루과이는 스페인과 무승부를 거뒀으나, 벨기에에 3:1로 대패했다. 1무 1패로 탈락 위기에서 대한민국과의 마지막 3차전 후반 45분에 어느정도 오심 덕을 본 극적인 결승골(0:1)로 1승 1무 1패가 되었다. 대한민국은 8강도 가능하다는 언플을 하다가 벨기에전에서 2:0, 스페인전에서 1:3, 우루과이전에서 0:1로 지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3전 3패 1득점 6실점으로 떡실신 당했다(…) 그나마 미드필더 황보관이 스페인전에서 114km/h 대포알 슛으로 1골을 넣어서 무득점 전패는 면했다. 참고로 스페인의 미첼 곤살레스는 무려 4골을 뽑아냈는데, 그중 3골이 한국전에서의 해트트릭이었다.
1986 멕시코 월드컵과 마찬가지로 한국은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다. 상대팀 분석이란 것도 없었고 현지 적응도 거의 되지 않았다. 너무 압도적으로 지역예선을 통과한 것도 외려 발목을 잡은 셈이 되었는데, 최종예선 5득점 1실점[15] 3승 2무 무패, 1차예선까지 포함한다면 9승 2무 무패 30득점 1실점으로 잉글랜드와 함께 유이한 무패 진출국이었기에 외신들부터 엄청난 복병으로 지목하기 시작했고, 이에 스스로도 문제없다고 월드컵을 무시하며 쉽게 16강이니 8강에 간다느니 1승 설레발을 언론이 신나게 퍼부었다. 이회택 당시 국대감독이나 김호곤 코치도 세월이 지나 그때 준비가 미흡하던 걸 이야기하며 아쉬워했다. 사실 이때만 해도 한국 국대감독은 '''무보수'''로 일하는 명예직이었다! 물론 식비나 교통비나 일부 승리수당이나 대회 상금을 얼마 정도 주는 보너스가 있었지만 정식 계약도 없고 그저 국대 감독이란 명예로만 연봉이니 그런 거 없이 일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1990 월드컵 전패 여파로 국대 감독도 정당한 계약을 맺자는 여론이 생겼고 결국 1992년부터 정식연봉 및 추가 수당을 주며 김호 감독이 처음으로 정식계약으로 국대 감독이 되었다.[16] 그런데 더 씁쓸한 건 이 당시 한국을 3전 전패로 몰아넣었던 스페인, 우루과이, 벨기에가 모조리 8강 진출에 실패했다는 것이다.[17]
F조는 상당히 특이한 결과가 나왔다. 잉글랜드가 이집트에 1:0로 이기며 1승 2무로 1위를 했다. 즉, 잉글랜드와 이집트간의 경기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경기가 다 무재배였다.''' 1패를 떠안은 이집트는 탈락, 남은 네덜란드와 아일랜드는 똑같은 '''3무에 2득점 2실점'''으로 골득실과 다득점까지 같고, 서로 비겨서 승자승 원칙도 무의미했다. 결국 양국은 '''동전 던지기'''로 순위를 가려 아일랜드가 2위로 16강에 진출, 네덜란드가 3위가 되었다.[18] F조는 정말 골이 안터졌으니, 그나마 무승부들도 모두 1:1 아니면 0:0이었다. 비록 이집트는 탈락했어도 선전했다는 평을 받았으며 당시 이집트 독재자이던 무바라크도 격찬했다.[19] 그리고 카메룬의 8강 진출 및 이집트의 선전을 이야기하며 아프리카 축구연맹은 피파에게 아프리카 참가국 수를 늘려달라는 요구를 하여 피파에서도 긍정적으로 동의하게 된다.
이후 각조 3위 6개국 중 상위 4개팀은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네덜란드, 우루과이가 되었다.
6.2. 결선 토너먼트
16강에서도 검은 돌풍이 계속되었다. 카메룬이 남미의 강호 콜롬비아에 연장접전 끝에 2:1 승리를 거두고 8강에 진출한 것. 이탈리아는 우루과이에 2:0 승리를 했고, 아일랜드는 루마니아와 0:0으로 승부차기에서 5:4 승리를 거두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연장 끝에 스페인이라는 대어를 잡았고(2:1), 서독과 잉글랜드는 각각 네덜란드와 벨기에에 승리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는 코스타리카에 4:1 압승을 거두었다.[20] 아르헨티나는 영원한 라이벌 브라질에 1:0 승리를 거두며 8강 대진을 완성시켰다. 웃기는 건 E조에서 한국을 3전 전패로 몰아넣고 사이좋게 16강에 올라간 스페인, 벨기에, 우루과이는 각각 유고슬라비아, 잉글랜드, 이탈리아에 패해 모조리 탈락했다는 사실(...)
8강 첫 경기에서 이탈리아가 아일랜드에 이기고, 아르헨티나는 유고슬라비아에 승부차기로 승리했다.[21] 서독은 로타어 마테우스의 페널티 킥으로[22] 체코슬로바키아를 꺾었다. 가장 치열했던 8강전인 잉글랜드 대 카메룬의 경기에선 잉글랜드가 선취골을 넣고도 카메룬에 61분 페널티킥에 이어 65분 역전을 허용하여 패색이 짙었으나, 후반 38분 천금같은 리네커의 동점골에 이어 연장 전반 15분 또 리네커의 재역전골이 작렬하며 간신히 이겼다. 노장 게리 리네커의 마지막 활약이 돋보인 경기. 펠레 스코어가 난 이 경기에서 카메룬의 동점골, 잉글랜드의 동점골 및 역전골은 모두 PK골이었다.
나폴리에서 벌어진 4강 제1경기. 자기를 응원하라는 디에고 마라도나의 도발에 '''"마라도나!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우리의 조국입니다''''로 응수한 나폴리 팬들이 주목을 받았다. 이 경기에서 이탈리아는 초반 우세한 경기를 이끌어나가다 1:1 동점골을 허용하고,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키커 2명이 연달아 실축해 4:3으로 탈락했다. 이탈리아 승부차기 징크스의 시작이 된 대회. 제2경기에서는 서독과 잉글랜드가 1:1로 비긴 후 역시 승부차기로 돌입, 잉글랜드의 마지막 키커 2명이 실축하여 서독이 승리했다. 이 경기에서 기록한 동점골은 리네커의 월드컵 마지막 골이다.
4강의 두 경기 모두 승부차기로 결과가 결정된 셈인데, 승리한 서독과 아르헨티나가 결승에서 맞붙었고 패배한 이탈리아와 잉글랜드는 3/4위전에서 맞붙었다. 3·4위전에서 이탈리아는 잉글랜드에 후반 41분 페널티 킥으로 승리하며 개최국의 체면을 살렸고, 다음날 열린 결승전에서 서독은 후반 43분 안드레아스 브레메의 PK골을 결승골로 가져가며 자국 역사상 3번째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다. 개인 수상 분야는 살바토레 스킬라치가 6골로 득점왕과 MVP를 모두 차지했다.
7.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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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화제의 팀들
'''대한민국 - 아시아 축구의 한계'''
1990년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이란과 당시 아시아 강호였던 쿠웨이트가 조기 탈락하는 이변이 발생한다. 쿠웨이트와 이란은 각각 아랍에미리트와 중국(!)에게 골득실에 밀리며 탈락하게 되고 일본마저 북한에 0-2로 패하면서 조기 탈락하게 된다. 대한민국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네팔, 인도와 조편성이 되어 그야말로 허니 오브 꿀조에 편성되었다. 당연히 1차예선에서 대한민국은 전승을 찍어버렸고 최종예선에 진출한다.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대한민국, 아랍에미리트, 중국, 사우디, 카타르, 북한이 진출했는데, 대한민국은 3승 2무의 성적으로 조1위로 본선에 오르게 된다.
어쨌건 통산 3회 본선진출을 이룬 대한민국은 비록 전설 차범근이 은퇴를 했지만 최순호, 김주성, 이영진, 이태호 등 수준급 선수들이 발굴되었으며 실제 카타르에서 열린 1988 AFC 아시안컵 카타르에서 준우승을 기록하며 기세가 좋은 상황이였다. 더욱이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은 그 중동의 강호 이란을 3-0으로 두들겨 패버렸고, 일본도 2-0으로 압살시켰다. 비록 승부차기 끝에 사우디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이 후 열린 90년 월드컵 예선에서 사우디에 승리를 거두며 복수까지 했고 결과적으로나 내용적으로도 나름 준수했는데 단 1실점으로 틀어막았고 그 1실점 역시 같이 본선에 오른 아랍에미리트에 내 준 골에 불과했다.
하지만 본선에서는 그야말로 무기력한 경기 끝에, 3전 전패를 기록하게 된다. 1차 벨기에전 및 2차 스페인전은 두말할 것도 없이 거의 두들겨 맞았으며[23] 마지막 우루과이전은 어느정도 선전했으나, 당시 심판을 본 이탈리아 국적의 툴리오 라네세의 노골적인 편파 판정 때문에 당시 대표팀 수비수인 前 여자대표팀 감독인 윤덕여 선수가 퇴장을 당하게 되고 결국 후반 인저리 타임에 우루과이의 다니엘 폰세카에게 골을 허용해 전패를 당하게 된다.[24] 믿었던 김주성이 오히려 부진했던데다가 아무리 유럽의 텃세가 심한 감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확실히 세계축구를 따라잡기에는 너무나도 머나먼 실력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대회였다. 특히 1, 2차전은 결과와 내용면에서 모두 완패를 당할 만했다. 그나마 대회 꼴찌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했을 정도였다.
'''카메룬 - 검은 돌풍의 원조'''
대회 직전까지만 해도 카메룬의 선전을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 편성 부터가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 동유럽의 절대 강자 소련, 만만찮은 동유럽의 다크호스 루마니아였으니 탈락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로저 밀러라는 위대한 스트라이커를 앞세운 카메룬은 결코 만만한 팀이 아니었다. 당시 감독이 발레리 니폼니시였다. 첫 경기에서 '''아르헨티나를 잡더니''', 뒤이어 루마니아에 2:1 승리를 거두는 대 이변을 일으키자 축구 관계자들은 카메룬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비록 수비력 불안과 결사적이었던 소련의 공세로 마지막 경기에서 소련에 0:4 참패를 당했지만 순위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카메룬은 죽음의 조에서 당당히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다.[25]
그리고 16강 콜롬비아전. 전후반 90분 내내 득점없이 연장전을 맞이한 카메룬은 맹렬한 공세를 펼치며 조제 밀라가 연장 후반 1분과 4분에 연속골을 터트리는 괴력을 선사했다. 콜롬비아가 연장 후반 15분에 1골을 간신히 만회했으나 이미 시간은 거의 다 흐른 뒤. 이로서 카메룬은 24개국 체제가 확고해진 이후에 처음으로 非유럽·중남미팀으로서 8강에 합류하는 신화를 썼다. 8강 상대는 축구종가 잉글랜드. 비록 선제골은 내줬으나 카메룬의 공격력은 막강했고, 후반 16분 PK골과 20분의 역전골로 유럽의 강호이자 축구종가인 잉글랜드마저 격침시키기 일보 직전까지 내달았다. 이제 8강이 아니라 4강이 문제였다. 그러나 카메룬의 수비 불안은 결국 발목을 잡아, 리네커에게 후반 38분 페널티 킥을 내주며 연장까지 흘러갔다. 결국 연장 전반 15분 역시 게리 리네커에게 페널티 킥으로 통한의 역전골을 허용하며 카메룬은 8강에서 신화를 멈췄다.
비록 카메룬은 8강에서 탈락했으나, FIFA와 세계 축구계는 아프리카 축구의 잠재성을 목격했다. 이후 FIFA는 1994 미국 월드컵에서 아프리카 티겟 수를 늘리는 것으로 화답했으며, 아프리카 국가들 역시 이에 화답하여, 94년 대회와 98년 대회 나이지리아의 2연속 16강, 02년 대회 세네갈의 8강, 06년 대회와 10년 대회 가나의 16강, 8강, 14년 대회 나이지리아, 알제리 2개 국가의 16강 진출을 이뤄냈다. 아프리카 검은 돌풍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근데 정작 카메룬은 그 이후로 단 한번도 조별리그를 통과해 본 적이 없다.'''[26]
'''아르헨티나 - 언더독이 된 디펜딩 챔피언'''
전 대회 우승팀인 아르헨티나는 이 대회에서는 개막전부터 카메룬에 지는 등 전반적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마라도나가 건재했지만 전반적인 팀 전력은 약해졌는데 그 댓가로 조별예선에서 3위로 처지면서 16강부터 브라질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브라질과의 16강전은 경기 내내 브라질에게 두들겨 맞다가, 세르히오 고이코체아의 신들린 선방에 단 한번의 역습찬스를 성공시켜 1-0으로 브라질을 격침하는데 성공한다. 브라질과의 16강전에서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아르헨티나-잉글랜드전에서 나온 마라도나의 하프라인 드리블 결승골에 비견할만한 엄청난 골이 나왔는데, 마라도나는 하프라인에서부터 드리블만으로 브라질 선수 3~4명을 따돌리고 다른 수비수들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후 클라우디오 카니자에게 골키퍼와 1:1을 만들어 주는 킬패스를 찔러넣어 결승골을 만들어 냈다. 참고로 마라도나는 왼발잡이로 오른발을 쓰는 일이 전무 할 정도로 없었는데 그 패스는 오른발로 했다.
8강에서도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고전하다가 승부차기 끝에 간신히 이기고 4강에 올라왔고 이후에도 이탈리아와의 4강전, 서독과의 결승전까지 모두 경기 내용에서 밀리는 경기를 했다.
그러나 디에고 마라도나의 판단력과 클라우디오 카니자의 엄청난 스피드로 한두 번 되는 역습 상황을 살려 무승부를 이끌고, 승부차기에서 세르히오 고이코체아 골키퍼의 선방쇼로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는 공식을 이어갔다. 실제 16강에서 브라질과의 경기는 브라질에게 무려 13번의 슛팅을 내 주고도 단 두 번의 슛팅에 마라도나의 킬 패스를 받은 카니지아의 딱 한방으로 브라질을 간신히 이겼고 이 후에도 8강 유고슬라비아전(0-0 무승부)과 이탈리아전(1-1무승부)에 밀리는 경기를 하면서도 가까스로 실점을 막거나 동점을 이끌어 내 승부차기에서 승리하였다. 이탈리아는 카니자에게 골을 허용하기 전까지 이 대회 예선부터 무실점 기록을 이어가고 있었으나, 첫 실점 후 멘붕 탓에 급격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결승전에서도 서독에게 일방적으로 밀렸음에도 실점을 허용하지 않고 서독의 공격을 잘 막아냈으나 2명이 논란성있는 퇴장을 당했고[27] 결국 후반 43분 서독의 안드레아스 브레메가 쏜 통한의 페널티 킥을 허용해 0-1로 패배하고 만다. 마라도나는 이 페널티킥 판정이 부당했으며, 월드컵을 도둑 맞았다는 주장을 하며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며, 시상식 내내 억울함의 눈물을 흘리는 마라도나의 모습이 전 세계에 중계되었다.
아르헨티나는 전 대회에 비해 전력이 많이 약화되면서 아슬아슬한 경기력을 보였고 토너먼트 내내 언더독으로 평가받았다. 마라도나는 상대방의 집중 견제에 시달리며 기록적인 횟수의 파울을 당했고 본인의 폼 또한 전 대회에 비하면 눈에 띄게 하락한 상태였지만 순간순간 번뜩이는 판단력으로 아르헨티나의 몇 안되는 찬스를 만들어냈다. 이 대회에서 아르헨티나는 총 4득점 4실점을 했으며, 마라도나는 2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마라도나와 더불어 골키퍼 세르히오 고이코체아도 언더독 아르헨티나의 결승행에 큰 공을 세운 선수였다. 사실 고이코에체아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우승 주역이었던 네리 품피도 골키퍼의 부상으로 인해 자리를 메우게 된 백업 골키퍼였다. 하지만 약해진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공세를 펼치던 강팀들을 상대로 신들린 선방을 보여줬고 2연속 승부차기 승리를 견인하며 오히려 토너먼트에서는 마라도나에 뒤지지 않는 존재감을 보여줬다.
'''이탈리아 - 무관의 제왕'''
이탈리아는 지난 대회와 달리 일신한 스쿼드로 개최국 버프까지 받으며 전력상 충분히 우승후보라 불릴 만했다. 하지만 그 좋은 실력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와의 4강전에서 마라도나의 심리전에 말려들며 쩔쩔매다가 결국 승부차기에서 연달아 실축을 범하며 패배한다. 이 때의 승부차기 패배를 기점으로 이탈리아는 2006년 독일 월드컵 우승 전까지 승부차기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
'''서독 - 게르만 삼총사, 조국을 최강의 팀으로 등극시키다!'''
대회 뚜껑을 열어보니 이 대회 명실상부한 최강 팀은 서독과 이탈리아[28] 였고, 서독은 로타어 마테우스를 중원 사령관으로 하여 당대 최고의 레프트윙 안드레아스 브레메, 1988 서울 올림픽 동메달 출신의 신예 위르겐 클린스만의 '''게르만 삼총사''', 가공할 공격력의 루디 푈러 등을 갖춘 막강 멤버로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였다.
서독이 가장 고전한 경기는 4강 잉글랜드 전. 당시 잉글랜드는 조예선 성적도 시원잖았고 8강전은 심판의 과도한 페널티 킥 남발로 카메룬을 운으로 이겼다는 평도 있어 서독의 우세가 예상되었으나 막상 뚜껑을 여니 서독을 엄청나게 압박하며 밀리지 않는 경기력을 선보여 명승부를 만들어 냈다[29] . 연장전에서도 서로 공격을 늦추지 않고 두 팀이 한번씩 골대를 맞춘 끝에 결국 승부를 내지 못하자 전문가들은 피터 쉴튼이란 노련한 골키퍼를 보유한 잉글랜드의 승리를 점쳤으나, 쉴튼은 1점도 방어를 하지 못했고 반면 잉글랜드 키커인 피어스가 가운데로 강하게 찬 것이 서독 보도 일그너 골키퍼의 발에 맞아 튕겨 나오면서 서독이 승리, 결승에 진출한다. 잉글랜드의 승부차기 연패 잔혹사는 바로 이 대회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처음부터 우승을 목표로 결승전을 위해 컨디션을 조절해오던 서독은 결승전을 대비해 이 경기에서 방심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은 측면도 분명히 있었다. 당시 잉글랜드는 예선부터 그리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 서독은 벤치 멤버인 올라프 톤을 선발 출전시키는 등 체력 안배를 위해 여유를 부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당시 거친 몸싸움으로 유명한 잉글랜드는 이 경기에서도 거친 반칙을 자주 사용했고, 때문에 결승을 염두에 두고 있던 서독 선수들이 상당히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태클이 들어올 만한 타이밍에서 위축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역시나 거친 태클이 들어와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또한 루디 푈러가 제 컨디션이 아니었고 결국 전반전에 통증을 호소하며 교체되었으며 교체로 들어온 신예 리들레는 대표팀 경험이 거의 없었다.
아르헨티나와의 결승전도 1-0이라는 스코어와 달리 상당히 일방적이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4년 전보다는 확실히 약해져있었다. 16강전에서 카레카의 브라질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다가 마라도나의 스루패스 한방으로 극적으로 8강에 오르는 등 마라도나와 카니자에 의존해 꾸역꾸역 결승에 올라온 처지였다.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는 10백을 시전했고, 거친 경기 끝에 선수가 두 명이나 퇴장당하는 악재 속에서도 후반 43분까지 0-0으로 버텼으나 결국 경기 종료를 코앞에 두고 페널티 킥을 내줬다. 당시 서독의 전담 키커는 로타어 마테우스였으며, 실제 마테우스가 한골을 더하면 스킬라치에 이어 실버슈를 수상 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결승전에서는 예상을 뒤엎고 브레메가 페널티 킥을 맡았다. 그 이유가 마테우스가 전반전에 축구화가 찢어져 후반전을 앞두고 새 축구화를 신게되어서, 발 감각이 온전치 못함을 염려해 브레메에게 킥을 양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판단은 적중하여, 브레메는 페널티 킥 방어의 신 세르히오 고이코체아도 막지 못할 골대 좌측 구석 으로 정확히 공을 차넣어[30] 서독이 우승하게 된다. 사실 서독은 이전 대회인 86 월드컵 결승전에서 초보 감독 베켄바워가 마라도나와 아르헨티나의 전력을 너무 과대평가한 나머지 수비 전술로 임했고 그 결과 2-0까지 밀렸다. 결국 이판사판으로 루디 푈러를 투입하며 맞불을 놓았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며 2-2까지 따라잡았으나 결국 패하고 말았던 경험이 있었다. 베켄바워는 수비 전술로 임했던 자신의 선택을 무척 후회했고, 90년 결승전에서는 토너먼트 때 하던대로 임했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3개월 후 서독은 통일을 이룬다. 정식으로 통일 된 것이 3개월 뒤이고, 베를린 장벽은 월드컵 기간중에 붕괴되었다. 실제 마테우스도 결승을 앞두고 동독에 계신 할아버지를 위해 우승컵을 바치고 싶다고 인터뷰했다. 정말 서독의 입장에서 1990년은 '''서독 역사상 최고로 축복받은 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났다.
당시 압박축구의 대세로 골 흉년이던 양상과는 달리 서독은 조별예선부터 4-1, 5-1 승부를 하며 대회 최다 골을 넣는 등 미드필더 5인방의 톱니바퀴 조직력을 앞세운 가장 화끈한 축구를 한 팀으로 잘 알려져 있다.
'''브라질 - 끝나지 않는 월드컵의 저주'''
1980년대 브라질은 지쿠, 소크라치스, 토니뉴 세레주, 호베르투 파우캉 등 새로운 황금세대들을 이끌고도 우승은 커녕 4강에도 들지 못했으며, 이 후의 황금세대들이 은퇴했지만 브란토 알레마오, 발도, 카레카[31] , 마우로 갈바오, 호마리우 등 새로운 신성들의 등장으로 1989년 코파 아메리카에 우승하며 건재함을 알렸다. 즉 지난 대회 우승팀인 아르헨티나보다, 브라질이 경기력으로나, 실력으로나 훨씬 더 우승후보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브라질은 본선 조별리그 C조에서 3전 전승으로 16강에 올랐고 이에 비해 아르헨티나는 B조에서 1승1무1패에 승점이 같은 루마니아에 골득실에서 밀리며 조 3위로 추락, 간신히 16강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운명의 장난일까,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16강에서부터 조우하게 된다.
경기는 그야말로 브라질의 가패삼기로 아르헨티나를 압박하고 있었으며 바우두, 카레카, 물레르 등의 융단폭격으로 아르헨 골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나마 아르헨티나는 고이코체아의 신들린 선방과 골대로 인해 0-0 상황을 끌어가고 있었을 뿐이다. 후반에도 브라질의 일방적인 페이스로 경기가 흘러갔지만 후반 중반 아르헨티나의 부루차가의 중거리 슛을 시작으로 아르헨티나의 경기력이 서서히 살아났고 특히 전반에 불안한 모습을 보인 아르헨티나 수비수인 로제리는 후반 중반을 이 후로 물레르와 카레카를 잘 막아내면서 점점 브라질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운명의 후반 36분 하프라인부터 치고 오는 마라도나의 번뜩이는 드리블에 5명이나 자리를 지키던 브라질 수비수들은 마라도나만 바라보며 뒷 공간을 파고 들어가는 아르헨티나 스트라이커인 카니자를 완전 방치해버렸고 마라도나는 그런 무방비 상태인 카니자에게 공을 전달했으며 카니자는 가볍게 골키퍼를 제치고 이 경기의 선제골이자 결승골을 뽑아내었다.
브라질이 수 차레 유효 슈팅에도 뚫리지 않는 아르헨티나 골문을... 아르헨티나는 단 두 차례의 기회만에 뚫어냈으니 파상공세를 퍼붓던 브라질 선수들은 심하게 동요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이제까지 아르헨티나의 공격을 잘 막아낸 리카르두 고메스는 이 한방에 이성을 잃으며 선제골 허용 이후 단 2분만에 퇴장까지 당하게 되고 결국 그렇게 경기는 1-0 아르헨티나의 승리로 끝이 났다.
'''네덜란드 - 오렌지 삼총사의 허무한 추락.'''
요한 크루이프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두 번의 결승진출로 축구 강호로 발돋움한 네덜란드는 1982년, 1986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탈락하면서 공백기가 있었으나 바로 UEFA 유로 1988에 우승하면서 화려하게 부활했고 스쿼드 또한 만만치 않았는데 마르코 판바스턴,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 등 말이 필요없는 밀란 제너레이션을 이끈 오렌지 삼총사와 로날드 쿠만, 빔 키프트, 반 티길렌 등 보좌하는 선수들의 네임드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본선에선 상당히 무기력했는데, 첫 경기 확실한 1승 카드인 이집트를 상대로 무승부를 내면서 뭔가 꼬이기 시작했다. 이어진 잉글랜드와의 2차전 이 때도 잉글랜드는 서독, 이탈리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에 비해 모자랐지만 지금의 뻥튀기가 심하지 않는 그래도 어느정도 이름값하는 잉글랜드였다. 게다가 피터 쉴튼, 테리 부처, 폴 개스코인, 게리 리네커 등 우수한 선수들도 보유했으나 그래도 전력상 네덜란드가 근소하게 우세했는데도, 0-0으로 비기고 말았다.
마지막 아일랜드와의 경기에서도 굴리트의 선제골을 지키지 못하고 니얼 퀸에게 동점골을 허용해 3연속 무승부를 거두며 16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16강 상대는 숙명의 라이벌 서독, 참고로 이 경기전 서독의 감독인 프란츠 베켄바워는 기자가 '''“16강에서 네덜란드를 만난 것이 부담이 되지 않느냐?”'''란 질문에 '''“우린 조1위로 16강에 진출했고 조별예선에서 형편없는 경기력으로 간신히 16강에 진출한 네덜란드가 부담이 될 것”'''이라고 디스하여 선수단을 동요시켰고, 결국 본 경기에서 레이카르트가 루디 푈러와 동반 퇴장을 당할 정도로 경기가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그렇게 10대 10으로 진행된 경기에선 클린스만의 선취골과 브레메의 환상의 감아차기골로 서독이 2-0으로 리드하고 있었으며 네덜란드는 후반 45분 로날드 쿠만의 PK골로 만회골을 넣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그렇게 우승도 가능한 전력의 팀인 네덜란드는 브라질과 16강에서 조기 탈락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조별예선에서 부진했던 아르헨티나가 당시 기세 좋은 브라질을 16강에서 잡으며 8강에 진출한 것과 달리 네덜란드는 조별예선에서의 부진으로 결과적으로 4강이나 결승에서 만나야 할 서독을 너무 일찍 만나버렸고, 거기에 프란츠 베켄바워의 심리전에 말려버리면서 팀의 조직력도 와해되면서 서독에게 무기력하게 패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조별예선에서 선전을 했다면 서독에 비해 충분히 해 볼만한 루마니아나, 벨기에를 만났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네덜란드는 최소 4강까지 갔을 수 있을 것이다.
'''소련 - 마지막 월드컵'''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공산주의의 붕괴로 인해 소비에트 연방 역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바람에 휘청이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1991년도에 해체가 되었으니 사실상 마지막이나 다름 없는 월드컵이였다. 비록 과거 레프 야신 시절의 무적 포스는 아니였지만, 야신의 후계자인 리나트 다사예프의 맹활약으로 UEFA 유로 1988에 결승에 오를 만큼 저력만큼은 무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조 편성부터가 죽음의 조였다.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와, 당시 동유럽의 강호 루마니아, 그리고 돌풍의 팀인 카메룬이었다.
루마니아와의 1차전에서 0-2로 완패당하고 이어진 디펜딩 챔프인 아르헨티나에게도 0-2로 패배당한다. 마지막 이변의 팀이라 불린 카메룬과의 3차전에서 전패만은 할 수 없다는 선수단의 결사항전에[32] 카메룬을 4-0으로 완파하면서 조 3위를 노렸지만, 하필 루마니아와 아르헨티나가 무재배를 하는 바람에 꼴찌 탈출에 실패했고, 결과적으로는 죽음의 조에서 꼴찌를 기록하면서 소련이라는 이름으로써의 마지막 월드컵을 망치고 만다.
'''아일랜드 - 지지만 않으면 된다.'''
'더티 리즈' 시절 리즈 유나이티드 FC의 레전드이자 잉글랜드 국대 출신인 잭 찰튼 감독의 지휘 하에 프랭크 스테이플턴, 크리스 휴튼, 로니 웰란, 믹 매카시, 존 올드리지, 나이얼 퀸 등의 우수한 선수들을 중심으로 견실하고 단순한 축구를 선보이며 조별 예선 3경기와 16강전을 통해 8강에 진출할 때 까지 4경기를 무재배했다. 요악하면 '무승 8강' 허정무식 축구의 원조라 할 수 있다.
9. 기록실
- 최다 득점 : 살바토레 스킬라치, 이탈리아. 6골.
- 최초 득점 : 프랑수아 오맘비크, 카메룬. 개막전 6월 8일 후반 22분.
- 최초 퇴장 : 에릭 위날다, 미국. 6월 10일 對 체코슬로바키아, 후반 7분.
- 최초 완전 무득점 경기 : 6월 13일 우루과이 對 스페인.
- 최초 승리 국가 : 카메룬 6월 8일 對 아르헨티나.
- 최초 다득점 국가 : 체코슬로바키아. 6월 10일 對 미국, 5골.
- 최초 페널티킥 : 미할 빌레크, 체코슬로바키아. 6월 10일 對 미국, 전반 39분.
- 최초 멀티골 : 토마시 스쿠라비, 체코슬로바키아. 6월 10일 對 미국. 전반 25분 및 후반 33분.
- 해트트릭
- 호세 미겔 곤살레스 마르틴 델 캄포, 스페인. 6월 17일 對 한국.
- 토마시 스쿠라비, 체코슬로바키아. 6월 23일 對 코스타리카.
- 최다 득점 경기 - 이 2경기는 최다득점차 경기 3개 중 하나이기도 하다.
- 6월 10일 체코슬로바키아 對 미국, 5 : 1.
- 6월 15일, 서독 對 아랍 에미리트, 5 : 1.
- 최다 득점차 경기 - 최다 득점 경기에 포함된 2경기 제외
- 6월 18일, 소련 對 카메룬, 4 : 0.
- 자책골 : 드물게도 자책골이 기록되지 않은 월드컵이다.
- 최초 역전승 : 6월 20일 코스타리카 對 스웨덴. 코스타리카 2 : 1 승.
10. 올스타팀
11. 한국측 중계진
- MBC
- 캐스터: 최창섭, 송재익, 김충식
- 해설: 신문선, 이우현
12. 결과
- 1위 : 서독
- 2위 : 아르헨티나
- 3위 : 이탈리아
- 4위 : 잉글랜드
- 골든슈 : 살바토레 스킬라치(이탈리아)
- 골든볼 : 살바토레 스킬라치(이탈리아)
- 실버볼 : 로타어 마테우스(서독)
- 브론즈볼 : 디에고 마라도나(아르헨티나)
- 신인상 : 로베르트 프로시네츠키(유고슬라비아)
- 페어플레이상 : 잉글랜드
- 올스타팀
- GK : 세르히오 고이코체아(아르헨티나), 루이스 가벨로 코네호(코스타리카)
- DF : 안드레아스 브레메(서독), 프랑코 바레시(이탈리아), 파올로 말디니(이탈리아)
- MF : 디에고 마라도나(아르헨티나), 로타어 마테우스(서독), 드라간 스토이코비치(유고슬라비아), 폴 개스코인(잉글랜드)
- FW : 살바토레 스킬라치(이탈리아), 로저 밀러(카메룬), 위르겐 클린스만(서독)
13. 여담
- "성악가가 되지 않았다면 세리에 C 에서 뛰어도 좋으니 축구선수가 되었을것이다."라고 말했을정도로 축구를 열광적으로 좋아한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개막식 축하 행사로 또 다른 세계 3대 테너인 플라시도 도밍고와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오 솔레미오'를 불렀다. 세계 3대 테너인 이 셋은 평상시 비교 당하기 싫어서 같이 부르는걸 주저했는데,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을 축하하기위해 파바로티가 불렀다고 한다. 이후에도 이 셋은 3Tenors라는 이름으로 1994년, 1998년, 2002년 월드컵 직전에 해당 국가에 가서 공연을 한 바 있다. 모두 지휘는 주빈메타가 담당했다. 2002년에는 우리나라에도 왔던 셈인데, 당시 파바로티의 컨디션이 너무 안좋았고, 레퍼토리 또한 94년 미국때와 완벽하게 똑같아서 욕 좀 먹었다. 이 때 세 명의 테너가 공연을 한 공연장은 '카라칼라 욕장' 즉, 로마시대에 목욕탕 자리였던 유적지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카라칼라 황제가 지었으며 로마 시대에 가장 큰 규모의 목욕탕이다. 단순히 목욕탕 기능 뿐만 아니라 체육관, 도서관 등의 기능도 갖춘 그 당시의 일종의 문화센터. 이 때 이후로 요즘에도 7,8월 여름 오페라 휴무기 때에는 이 유적지에서 야외 오페라 공연을 한다.
- 한국과 함께 본선에 진출한 UAE는 석유 부국답게 아부다비 왕국 국왕이 월드컵 본선에서 자국 대표팀이 단 한 골이라도 넣는다면 선수들 전원에게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사주겠더고 약속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전 공격수 토마스 스쿠라비는 “우리는 롤스로이스는 고사하고 나라에서 자전거라도 한 대 사줬으면 좋겠다.” 라고 푸념하기도 하였다.
[1] 이때까지만해도 수비수가 백패스 해준 공을 골키퍼가 손으로 잡을 수 있었다.[2] 게다가 두 경기는 같은 날에 열렸다.[3] SS 라치오와 AS 로마의 홈구장. 1960 로마 올림픽 주경기장이기도 했다.[4]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와 AC 밀란의 홈구장[5] SSC 나폴리의 홈구장[6] 과거 유벤투스 FC와 토리노 FC의 홈경기장. 철거 후 알리안츠 스타디움으로 재건축되었다.[7] FC 바리 1908의 홈구장[8] AC 키에보베로나와 엘라스 베로나 FC의 홈구장[9] ACF 피오렌티나의 홈구장[10] 칼리아리 칼초의 홈구장[11] 볼로냐 FC의 홈구장[12] 우디네세 칼초의 홈구장[13] US 팔레르모의 홈구장[14] UC 삼프도리아와 제노아 CFC의 홈구장[15] 그나마 마지막 경기 주전들을 상당히 뺀 상태에서의 경기였다.[16] 후에 KBS에서 브라질 월드컵 개막 직전에 방영한 국가대표팀 관련 다큐멘터리인 ''''2014 브라질 월드컵 특집 다큐멘터리 : 대한민국 월드컵 도전사'''' #를 보면 90년 월드컵에 참가한 당시 선수들의 아쉬움을 느낄 수 있다.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였던 전 국가대표 선수인 최순호와 김주성, 박경훈은 대회때 느낀 아쉬움을 여지없이 토로하였는데 그 중 박경훈 전 감독의 경우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압박축구로 나타났던 그때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게 결정적인 패인''''이라고 말하면서 세계 축구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한 우리 대표팀의 자세에 커다란 아쉬움을 드러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 지역 예선에서 한국은 '''6전 전승에 25득점'''을 작렬시켜 아시아 무대를 거의 주름 잡았고 상대들도 거의 약한 모습을 보여주다보니 쉽게 경기를 풀어갈 수 있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언론들의 설레발은 계속해서 펼쳐지게 되었고 그런 분위기에 적응된 대표팀도 역시 대회에 참여하며 나섰지만 결국 전패 탈락의 아픔을 느끼는 굴욕속에 대회를 마무리 짓게 된다.[17] 스페인은 유고슬라비아한테 1:2로, 우루과이는 이탈리아한테 0:2로, 벨기에는 잉글랜드한테 0:1로 각각 져서 8강 진출에 실패했다.[18] 28년 후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일본과 세네갈이 똑같이 1승 1무 1패에 골득실차 0, 승점도 똑같이 4였고, 서로의 대결도 비겼다. 하지만 그 대회부터 도입된 페어플레이 점수에서 일본(-4)이 세네갈(-6)보다 앞서서, 일본은 조 2위로 16강에 진출하고 세네갈은 조 3위로 탈락했다.[19] 하지만 이집트는 1990년 대회 이후 28년간 월드컵에 나서지 못하였고 오히려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을 휩쓸며 아프리카 대표로 FIFA 컨페더레이션스 컵에 나서기도 하였지만 최근 행보를 본다면 네이션스컵을 휩쓸었던 리즈 시절과는 거리가 멀어서 안습한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유독 월드컵 징크스가 큰 나라였으나, 28년만에 러시아 월드컵에 나가게 되었다.[20] 토마스 스쿠라비의 해트트릭[21] 유고슬로비아 쪽에서는 지난 경기에서 2골을 넣었던 드라간 스토이코비치가 실축했고 아르헨티나에서도 디에고 마라도나가 실축했다.[22] 이 때 페널티킥 판정에 대해 심판에게 격렬히 항의하던 체코슬로바키아 선수가 축구화를 허공에 던져버려서 그대로 퇴장을 당했다(…)[23] 그나마 스페인 전에서는 한골을 넣었다.[24] 사실 이 골은 오프사이드였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이탈리아가 16강 상대로 만만한 우루과이랑 만나려고 억지로 우루과이의 승리를 안겨주었다는 설이 있다. 하필 이 경기 심판이 이탈리아인이었던지라 더더욱 그런 음모론이 잘 먹혔다. 만일 이 때 우루과이가 한국을 이기지 못했다면(즉, 그 오프사이드를 제대로 판정해서 0:0으로 비겼더라면) 오스트리아가 16강에 가게 되고 이탈리아의 대진 상대는 콜롬비아가 되었을 것인데 이 당시 콜롬비아의 전력은 우루과이보다 훨씬 더 막강하다는 평을 받았었다. 실제로 이 때 콜롬비아는 한국을 상대로도 비실거리다 심판 편파판정 덕에 겨우 1 : 0으로 이긴 우루과이와 달리 이 대회 우승팀인 서독과 무승부를 기록할 정도로 선전하기도 했다.[25] 그로부터 8년 뒤의 월드컵에서 같은 아프리카 국가인 나이지리아도 1990년때의 카메룬과 비슷하게 스페인과 불가리아를 잇달아 꺾은 뒤 마지막에 파라과이한테 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조 1위로 당당히 16강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26] 그래도 대회마다 기복이 심한 아시아 지역과 달리 아프리카는 매 대회마다 꾸준히 조별리그를 통과하는 팀이 나온다. 1998년에는 나이지리아가 스페인을 제치고 16강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으며, 2002년에는 세네갈의 8강 돌풍, 2006년과 2010년에는 가나의 분투가 있었다. 2014년에는 나이지리아와 알제리가 16장 진출. 하지만 2018년에는 단 하나의 아프리카 국가도 16강에 진출하지 못했다.[27] 실제로 30분경 아르헨티나 선수 하나가 논란성이 있는 퇴장을 당했다. 참고로 아르헨티나에게는 월드컵에서 징크스가 하나 있는데 '''심판이 이탈리아 사람인 경기는 무조건 패배했다.''' 가장 최근이었던 2014년 월드컵 결승전에서도 이 징크스는 여지없이 들어맞았고 결국 0-1로 졌다.[28] 그러나 이탈리아는 4강전에서 우세한 경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의 역습에 당해 탈락.[29] 실제로 데이비드 플랫의 헤딩슛이 오프사이드 판정을, 크리스 워들의 슈팅이 서독 골키퍼의 손에 맞고 골대를 튕기고 나갔으며 또한 서독도 위르겐 클린스만과 루디 푈러가 비슷하게 골찬스를 놓칠 만큼 치열한 경기를 펼쳤다.[30] 실제 고이코체아는 정확히 방향을 읽고 빠르게 몸을 뻗었으나 킥이 워낙 구석으로 향해 아슬아슬하게 손이 닿지 못해서 결국 골을 허용하고 말았다.[31] 1986년 월드컵 득점 3위[32] 참고로 소련이 카메룬을 이기고 '''루마니아와 아르헨티나의 경기에서 승부가 갈리면''' 1승 2패 동률이 되는 팀끼리 골득실을 비교해 볼 수는 있었다. 월드컵이라 상대전적이 아닌 골득실을 먼저 따졌기 때문이다.[33] 2006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는 이탈리아에 우승을 내주고 3위를 했다.[34]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 우승을 서독에 내줬으나 16년 후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서 우승을 한다.[35] 그나마 조별리그 3차전인 대한민국 대 우루과이 경기에서 주심이 정상적으로 후반 막판에 나온 다니엘 폰세카의 골을 오프사이드로 처리하였더라면, 이 경기가 무승부로 끝났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이 이 월드컵에서 1무 2패를 거둔 유일한 팀이 되었을 것이다.[36] 지난 멕시코 대회만 해도 한국 출전 3경기와 개막전, 결승전만 생중계였다.